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에즈 운하 (문단 편집) === 건설 === 오늘날 존재하는 현대적인 운하의 역사는 [[1805년]] [[메흐메드 알리|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오스만령 이집트의 대총독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했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41년]]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에 메흐메트 알리와 우호관계를 맺은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 개통을 위한 [[주식]]을 공매하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페르디낭 마리 레셉스|페르디낭 M. 레셉스]](Ferdinand M. Lesseps)인데, 프랑스 [[외교관]]으로서 이집트에 파견된 차에 메흐메트 알리 및 그 [[아들]]과 친분관계를 쌓았다. 메흐메트 알리 사후 그 아들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의 새 지도자가 되자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이집트 법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에 운하의 운영권을 양도하고 99년간 운영 후 운영권을 이집트에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문제는 자금 조달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는 난공사이므로 당연히 자금도 많이 소모되었다. 수에즈 운하회사는 주식 총 40만 주를 발행하여 매각해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지만, 이른바 '''큰 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정부]]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고, 40만 주 중 20만 7,000 주에 달하는 프랑스 측 지분은 모두 프랑스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나뉘어서 매각되었다. 그나마도 대규모로 사겠다는 고객이 없어서, 주주가 21,000명에 달해서 평균 구입 주식 수가 10주도 안 되었다. 100주 이상 구입한 사람이 199명밖에 없을 정도였다. 나머지 주식들은 운하에 관심이 있을 법한 주요 [[강대국]] 정부에 분할매각을 추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당시 제안 받은 나라들은 [[영국]][* 8만 주를 제안했다.], [[러시아 제국|러시아]], [[미국]][* 2만 주를 매입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 등이었는데, 영국을 제외하면 수에즈 운하가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나라들이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경우 영국이 운하를 손에 넣고 나서 극동 무역에 승차해 어느정도 이익을 봤다.] 프랑스가 이들 정부에 주식 매입을 타진한 이유는 당연히 영국의 방해에 맞서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자유무역이란 개념이 없어서 해군력으로 해로를 유지해야하는 당대 기준으로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일이 없는 위치에 있는 국가들에 접근한 건 꽤나 어이없는 일이다.[* 그리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국가가 없는 것을 보고 이집트와 프랑스는 이 나라들에게는 애초에 '''조금 저렴'''한 요금조차 제공할 의지도 없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당시 그리스는 아직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소국이었고 이탈리아는 아직 통일도 안 된 상태였다. 그보다는 운하 경영에 참여할 여유조차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이 수에즈 운하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인 이유는 크게 둘이었다. 영국은 이미 전 세계 해양 패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운하가 그다지 급하게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운하를 빌미로 프랑스가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고 이를 발판으로 인도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운하 건설에 도움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에 프랑스 측이 책정한 이용료 문제가 기름을 끼얹었다. 지분의 과반수를 차지한 프랑스의 운하 운영 정책이 차별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규칙으로 '''최대 주주인 프랑스는 매우 저렴하게, 주식을 사면 조금 저렴하게, 안 사면 매우 비싸게 통행료를 매겼다.''' 이런 차별적인 요금정책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은 이렇다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영국은 프랑스보다 비싸게 물어야한다는 사실에 8만 주를 인수해 달라는 레셉스의 요청을 아예 보이콧해버렸다. 영국 상인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후술된 HMS 뉴포트의 불법 통행 행위가 옹호받은 것도 이 불만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정작 운하가 뚫리자 가장많이 운하를 이용한 것은 영국 배였다. 개설 후 1년 동안 운하를 통과한 배 중에 2/3가 영국 선박이었으며, 수에즈 운하를 영국이 구입할 당시에는 80%의 물동량이 영국 선박이었다고 한다. 대영제국 시절의 어마어마한 국제 교역량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이집트 정부는 운하를 통해 돈방석에 앉는 장미빛 꿈을 꾸었으나, 최종적으로는 16만 7천 주에 달하는 주식을 이집트 정부가 덤터기를 쓰게 되었다. 사실 망상에 가까운 자금 조달 계획에 가까웠던 것이, 그나마 팔아치운 프랑스 주식 조차도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의 도움으로 간신히 팔아치운 것이다. 그나마 로스차일드한테도 처음에는 퇴짜를 맞았는데, 주식 취급 수수료로 '''5%'''를 내라는 로스차일드 측의 요구를 레셉스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주식판매 및 자금조달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영국의 방해는 끝나지 않았다. 영국은 수에즈 인근 사막부족들에게 반란을 부추긴다거나, 수에즈 운하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다며 사실상의 [[노예]]노동이라고 비난하는 등 지속적으로 건설을 방해했다. 이 때문에 레셉스가 '''영국도 [[인도]]에서 [[인도 제국|똑같이 하지 않느냐고]]''' 항변하기도 하였다. 결국 협상 끝에 수에즈 법인이 이집트 소유의 이집트 회사이며, 프랑스 정부에는 어떠한 [[권리]]가 없다는 최종 합의가 이뤄진 끝에 공사 시작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9,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비용은 처음 주식을 공모할 때의 예상치의 2배 이상으로 들었다. 운하를 처음으로 통과한 [[선박]]은 [[영국 해군]] 연안[[포함]] HMS 뉴포트(Newport)였다. HMS 뉴포트는 운하 공식개통 전날인 11월 16일 밤에, 모든 조명을 끄고 몰래 운하를 통과하는 무모한 행동을 감행했다. 운하 회사 관계자들은 감히 영국의 [[비위]]를 거슬릴까 염려하여 항의도 하지 못했다. 이후 뉴포트의 [[함장]]은 공식적으로는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내부적으로는 프랑스 놈들에게 [[영국 해군|대영제국 해군]]의 [[기상]]을 보여줬다며 칭송받았다고 한다. 이 공사를 지휘한 페르디낭 드 마리 레셉스는 운하 개통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또 다른 대규모 운하 프로젝트인 [[파나마 운하]] 공사(문서 참고)에도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몰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